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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인터뷰

[임백준 컬럼(2)] 용기는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우아함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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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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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BIT

23,399

저자: 임백준

임백준 키웨스트(Key West)는 플로리다의 남단에 위치한 도시 마이애미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를 운전하면 갈 수 있는 섬이다. 미국에서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한 섬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하면 ‘땅끝마을’에 해당한다. 얼마 전에 여름휴가로 키웨스트를 다녀오면서 플로리다 사람들이 섬을 아일랜드가 아니라 ‘키(Key)’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쪽의 섬’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키웨스트로 가는 길은 플로리다 키즈(Florida Keys)라고 불리는 수많은 섬을 다리로 연결해 놓은 좁은 도로다. 길을 가다보면 때로 차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물이 가깝다. 좌우로 펼쳐지는 코발트블루 바다의 풍광과 이국적인 야자수 나무가 여행객의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섬 전체가 하나의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는 키웨스트는 ‘밤 문화’가 꽃이다. 수많은 술집이 밀집되어 있는 거리에 나서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에서 살던 9년 동안 거의 매일 들려서 술을 마셨다는 술집 ‘슬로피 조(Sloppy Joe"s’)라는 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서 술을 마신다. 거리를 걸으며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으로 활기찬 모습이 느껴진다. 슬로피 조는 헤밍웨이 때문에 유명해진 장소지만 직접 가보니 헤밍웨이의 문학적 향취 같은 것은 느낄 수 없고, 밴드가 생음악을 연주하고 손님들은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흔한 관광지 술집 이상의 모습은 없다. 술집 바로 옆에 붙은 작은 가게에서 헤밍웨이의 얼굴이 인쇄된 셔츠를 팔고, 백발 수염과 머리가 성성한 말년의 헤밍웨이 얼굴을 닮은 ‘가짜’ 헤밍웨이들이 술집에 앉아서 손님들과 사진을 찍는 것을 빼면 이 술집과 헤밍웨이 사이의 연결점은 찾기 어려웠다. 밤거리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다가 ‘더티 해리(Dirty Harry)’라는 작은 바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록음악을 연주하는 3인조 밴드의 수준이 상당해서 나도 모르게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오랫동안 앉아 있기도 했다. 홀에는 스무 개 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지만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슬로피 조와 달리) 손님이 앉아 있는 곳은 서 너 곳 밖에 없었기에, 젊고 실력 있는 록밴드의 음악이 애잔한 발라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킬리만자로의 눈’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쓰면서 1931년에서 1939년까지 살았던 집은 키웨스트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관광명소다. 권투, 낚시, 투우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열정적인 헤밍웨이가 두 번째 부인과 살았던 이 집은 1930년대 이래로 키웨스트의 명물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짧고 하드보일드 한 문체를 구사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정과 열정을 품고 살았던 작가가 살았던 집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그의 문학적 족적을 반추해 보려고 애를 썼는데, 집의 분위기와 구조를 보면 어쩐지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이 실제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슬로피 조에서 만취가 된 상태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그 시절에는 변기의 물이 머리 위에 있는 작은 물탱크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물을 내리기 위해서 줄을 당겼는데 엉뚱한 줄을 세게 당겨서 물탱크가 무너져 내리면서 머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는 일화, 권투를 너무나 좋아해서 집의 뒷마당에 링을 설치한 다음 권투선수를 초빙해서 함께 권투를 했다는 일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때로는 취재를 위해서 때로는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서 달려갔다는 일화 등은 남달랐던 그의 작가적 창조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추측을 할 수 있게 해준다.

헤밍웨이의 집을 흥미롭게 둘러보면서, 마당에 잎이 넓은 야자수 사이로 벤치와 분수대가 놓여있고, 뒷마당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고, 창밖으로 시원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널찍한 방들이 있고, 최고급 샹들리에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고, 귀여운 고양이들이 뛰어노는 멋진 집이긴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결정적인 무엇이 하나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짙은 코발트색으로 펼쳐진 멕시코만의 바다보다, 크고 높게 올라가서 좌우로 활짝 펼쳐진 야자수 나무의 이국적인 자태보다, 007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매력적인 실내 인테리어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눈치 채었겠지만 그것은 바로 컴퓨터다.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의 집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오늘의 우리는 방 안에 놓인 컴퓨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헤밍웨이가 뒷마당에서 했던 권투를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서 할 수 있다. 권투만이 아니라 축구와, 골프와, 수영도 할 수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전투’에도 마음껏 참여할 수 있다. 헤밍웨이가 슬로피 조에서 가졌던 친구들과의 떠들썩한 대화, 아름다운 여성들과의 교제를 우리는 컴퓨터 안에서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다. (물론 헤밍웨이가 실제로 몸으로 획득한 경험을 컴퓨터를 통해서 경험하는 내용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집이 제공하는 상상의 폭과 깊이가 멕시코만 바다의 그것이라면, 컴퓨터가 제공하는 상상의 폭과 깊이는 태평양의 그것이다. 그러한 컴퓨터라는 바다에 물을 채워 넣는 사람은, 컴퓨터라는 우주에 온갖 물질을 채워 넣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개발자들은 자기 자신의 상상력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을 책임지고 있는 의미심장한 존재다.

헤밍웨이는 ‘용기는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우아함(courage is grace under pressure)’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것은 마치, 코앞에 다가온 납기일에 쫓겨서 우왕좌왕하기 일쑤인 우리들 개발자들을 위해서 헤밍웨이 형님이 특별히 남겨준 격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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