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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브루 컴퓨터 클럽으로 마지막 해커의 꿈을 만들 무대를 마련하다.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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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8

|

by 한빛

13,419

 

3월하고도 다섯 번째 날 밤, 실리콘 밸리에는 비가 내렸다. 아직 이름 없는 그룹의 첫 모임에 참석한 32명은 차량 두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고돈 프렌치의 차고 속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모임에 참석한 일부는 서로 안면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프레드 무어가 붙인 게시물을 보고 무작정 찾아왔다. 리 펠젠스타인과 밥 마쉬는 리의 낡은 소형 트럭을 몰아 버클리에서 왔다. 밥 알브레히트는 그룹의 탄생을 축하하고 MITS가 PCC에 빌려준 알테어를 자랑할 겸 참석했다. 초창기 인텔 4004 칩으로 거의 불가능한 컴퓨터를 직접 만들었던 프리랜서 엔지니어 톰 피트만은 직전 달 컴퓨터 학회에서 프레드 무어를 만난 후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여전히 나머지 알테어 부품을 기다리는 스티브 돔피어는 로렌스 홀에 붙은 게시물을 보고 왔으며, 전자기기 부품 상점을 운영하는 마티 스퍼걸은 엔지니어들에게 칩을 홍보하러 참석했다. 알란 바움이라는 휴렛-패커드 사 엔지니어는 모임에 대해 듣고 주제가 새로운 저가 컴퓨터인지 궁금해서 참석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던 친구이며 회사 동료이기도 한 스티븐 워즈니악을 끌고 왔다.

 

 

차고에 모인 거의 모두가 하드웨어에 미쳐있었다. 새 모임이 하드웨어를 공부하는 일종의 사교 모임이 되리라 기대하는 프레드 무어를 제외하고 말이다. 프레드 무어는 그날 모인 사람들이, 훗날 고돈 프렌치의 표현을 빌자면 ‘한 지붕 아래 모이기 힘든 정말 최고의 엔지니어와 기술자’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집에다 컴퓨터를 들이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공부하려고, 갖고 놀려고, 컴퓨터로 뭔가 해보려고... 컴퓨터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테어는 그들의 꿈이 가능하다는 증거였으며, 목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전율이었다. 그리고 (차량 두 대는 고사하고 한 대도 온전히 못 들어갈) 고돈 프렌치의 어수선한 차고 작업장에는 바로 그 알테어가 놓여있었다. 밥 알브레히트가 알테어를 켜자 LED가 반짝였고, 모두는 그 완강한 정면 패널 속에 와글거리는 작은 이진 비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LDA하고, JMP하고, ADD하면서...

 

 

프레드 무어는 앞쪽에 탁자를 차려놓고 기록을 맡았고, 자신의 홈브루 8008 기계가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고돈 무어는 진행을 맡았다. 모두가 자신을 소개했다. 알고 보니 32명 중 6명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만의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어봤으며 알테어를 주문해놓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곧바로 칩, 특히 8008의 상대적인 장점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다. 사실 토론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16진수 대 8진수, 8080 명령어, 종이테이프 저장 장치 대 카세트 대 종이와 필기... 그들은 각자 모임에서 원하는 바를 토론했고,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협력’과 ‘공유’였다. 가정에서 컴퓨터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토론했고, 일부는 게임과 가전기기 제어와 문서 편집과 교육을 제안했다. 리는 커뮤니티메모리를 언급했다. 알브레히트는 『PCC』 최신호를 나눠주었다. 스티브 돔피어는 알바커키로 순례갔던 경험과 MITS 사가 주문 물량 4,000여 대를 채우느라 얼마나 애쓰는지, 기본 키트 생산에 바빠 (알테어가 LED를 반짝이는 것 이상을 하게 만들) 추가 부품 생산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프레드 무어는 모임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굉장히 흥분했다. 자신이 뭔가를 시작한 기분이었다. 당시는 그 지적인 열기의 원천이 컴퓨터 대중화가 일으킬 사회적 변화에 대한 기획자적인 사색이 아니라 기술에 매료되어 한껏 고조된 해커적인 심취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기꺼이 함께 일하려는 모두의 태도에 들떠 무어는 2주에 한 번씩 만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떠나려는 참에는 그룹이 실천하려는 자유 교역 개념을 상징이라도 하려는 듯 (나중에 그룹에서 고물상이라 불린) 전자부품 가게 주인 마티 스퍼걸이 인텔 8008 칩 하나를 들고 “이것 가질 사람?”이라 물었고, 수백만 불짜리 TX-0에 맞먹는 힘을 제공하는 손톱 크기의 기술 조각을 처음 손든 사람에게 던져주었다.

 

 

엉클 존 맥카시의 고향이자 톨킨Tolkien풍 해커들의 고향인 작은 언덕 위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실에서 열린 두 번째 모임은 40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했다. 그날 모임 대부분은 그룹 이름을 정하느라 보냈다. 무한소 컴퓨터 클럽, 작은 두뇌들, 스팀 비어 컴퓨터 클럽, 민중의 컴퓨터 클럽, 8비트 프로그래머, 베이 에어리어 컴퓨터 실험가들의 그룹, 미국 아마추어 컴퓨터 클럽 등이 후보에 올랐다. 결국 사람들은 베이 에어리어 아마추어 컴퓨터 사용자 그룹 –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으로 결정했다. 마지막 세 단어는 실질적인 명칭이 되었다. 진정한 해커 정신에 의거해 그룹은 가입 절차가 없었으며, 비록 모임 공지와 소식지 비용으로 누구든 원하면 1불을 기부하자고 프렌치가 제안하자 세 번째 모임까지 52.63불이 모였지만 회비도 없었으며, 임원도 뽑지 않았다.

 

 

네 번째 모임이 다가오면서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 해커 천국이 되리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1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퍼닌술라 학교에서 모일 예정이라는 소식지를 받았다. 퍼닌술라는 멘로 공원 숲 근처에 위치한 외떨어진 사립 학교였다. 그즈음 스티브 돔피어는 알테어를 마침내 완성했다. 어느 아침 10시경 마지막 부품을 받은 돔피어는 곧바로 36시간을 쉬지 않고 매달렸으나 256바이트 메모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6시간을 더 투자한 끝에 돔피어는 버그 원인이 인쇄 기판의 긁힌 자국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긁힌 자국을 대충 수선해 버그를 고치고 나니 컴퓨터로 무엇을 할지가 고민스러웠다.

 

 

알테어 조립을 끝낸 사람들에게 MITS 사가 제공하는 유일한 옵션은 기계어 프로그램이었다. 8080 칩 명령 LDA, MOV, ADD, STA, JMP를 사용하는 프로그램으로 숫자 두 개를 더하는 기능이었다. 입력은 정면 패널에 있는 아주 작은 스위치들로만 가능했으며,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반짝이는 8진수 LED 값을 머릿속에서 16진수로 변환하면 답이 나왔다. 최초로 달에 발을 딛는 역사적 인물이 되는 기분이리라. 수 세기 동안 인류를 괴롭힌 문제의 해답을 얻는다! 6에다 2를 더하면? 8! “컴퓨터를 아는 엔지니어들에게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초창기 알테어 소유자이자 홈브루 클럽 회원 해리 갈렌드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물론 컴퓨터 문외한들은 이런 경험이 왜 놀라운지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스티브 돔피어에게 이런 경험은 전율이었다.

 

 

스티브 돔피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돔피어는 모든 칩 기능을 확인하는 작은 기계어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알테어 메모리가 너무 작은 터라 프로그램도 엄청 작아야만 했다). 자신의 입력 장치 10개에, 그러니까 열 손가락에 두꺼운 군살이 박힐 정도였다. 8080 칩에는 72개에 이르는 기능 명령 집합이 있었고, 그래서 할일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추어 파일럿인 돔피어가 저주파 라디오 방송으로 일기예보를 들으며 일하다 숫자 정렬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려고 프로그램 ‘실행’ 스위치를 눌렀을 때 아주 신기한 현상이 발생했다. 라디오가 지직! 지지직! 지지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알테어 내부 여기저기서 비트가 바뀌면서 라디오가 전파 방해를 받는 소리였다. 돔피어는 라디오를 가까이 당긴 후 프로그램을 다시 돌렸다. 이번에는 지직 소리가 더 크게 났다. 돔피어는 가슴이 뛰었다. 알테어 8800 컴퓨터의 첫 입출력 장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문제는 장비를 통제하는 방법이었다. 돔피어는 기타를 가져와 현을 튕겨봤다. 컴퓨터가 메모리 주소 075번에서 내는 소리가 F# 음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돔피어는 모든 음의 메모리 위치를 파악할 때까지 해킹을 계속했다. 여덟 시간 정도 걸려 모든 음계를 파악한 돔피어는 음악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비록 피터 샘슨의 우아한 PDP-1 음악 프로그램과 비교가 안 되게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돔피어가 그 미친 스위치들로 프로그램을 입력하는 데는 엄청난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홈브루 그룹이 퍼닌술라 학교에 모일 즈음 돔피어는 그가 우연히 발견한 악보의 첫 부분인 비틀즈의 ‘언덕 위의 바보Fool on the Hill’를 연주할 준비를 끝냈다.

 

 

모임은 공포 영화인 아담스 패밀리에 나올 법한 거대하고 오래된 목조 건물 2층 어느 방에서 열렸다. 물론 돔피어의 알테어는 경탄의 대상이었고, 돔피어는 모두에게 최초로 공개된 응용 프로그램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돔피어가 알테어를 켰을 때 컴퓨터는 동작하지 않았다. 회의실 콘센트가 작동하지 않는 탓이었다. 멀쩡한 콘센트 중 가장 가까운 것은 1층에 있었고, 1층부터 2층까지 기다란 연장선을 연결한 후에야 마침내 알테어는 돌아갔다. 비록 연장선 길이가 조금 짧아 컴퓨터가 회의실 문턱에 반쯤 걸쳐 있었지만 말이다. 돔피어는 오랜 시간 올바른 스위치를 튕겨가며 8진수 코드로 노래를 입력했고, 거의 끝나갈 즈음 복도에서 놀던 아이 두 명이 코드에 걸려 넘어지며 플러그를 빼버렸다. 이 사고로 메모리 내용이 몽땅 지워졌고, 돔피어가 비트 단위로 입력하던 내용도 함께 날아갔다. 돔피어는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동작하는 알테어 응용 프로그램을 대중 앞에서 최초로 시연코자 모두를 조용히시켰다.

 

 

그는 ‘실행’ 스위치를 눌렀다.

크고 위협적인 컴퓨터 몸체 위에 놓인 작은 라디오가 윙윙거리는 쇳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종의 음악이었고, 폴 매카트니의 애처로운 발라드 첫 몇 소절이 끝날 즈음 대개는 최신 칩의 소문에 대해 수다를 떠느라 왁자지껄한 해커들은 경외로 가득한 침묵에 빠졌다. 스티브 돔피어의 컴퓨터가, 첫 학예회 무대에 서는 1학년 어린이의 순수하고 떨리는 천진함으로 노래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 완전히 얼이 나간 침묵만 남았다. 그것은 자신들이 공유하던 꿈이 현실이라는 증거였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막연하고 어렴풋이 여겨졌던 꿈이었다.

 

 

미처 충격에서 회복하기 전에... 알테어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돔피어를 제외한) 누구도 잇따른 공연을 예상하지 못했다. 데이지라는 노래였고, 1957년 벨 연구소에서 최초로 컴퓨터가 연주한 노래라는 사실을 일부 해커들은 알았다. 컴퓨터 역사에서 그 중요한 사건에 필적하는 사건이 바로 자신들 귀 앞에서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앙코르 연주여서 음악은 마치 조상인 IBM 괴물과의 유전적 연관성에서 나오는 듯 느껴졌다(큐브릭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에 할이라는 컴퓨터가 죽으며 아이처럼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암시된 개념이었다).

알테어가 연주를 끝냈을 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안에서 커다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해커들은 서로 손을 맞잡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홈브루는 너무 열정적이라 컴퓨터 분야를 떠나지 못하는 전문가들, 기술의 가능성에 매혹된 아마추어들, 정부와 회사와 특히 IBM이 컴퓨터를 혐오스러운 사제직에 위탁해버린 억압적 사회를 뒤집겠다는 목표에 전념하는 기술-문화 게릴라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남성들의 모임이었다. 리 펠젠스타인은 그들을 ‘탈출자 한 무리, 적어도 업계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한 사람들’이라 불렀다. “감시하는 상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형님들이 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합당한 방식으로 뭔가를 이뤄낼 기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거의 컴퓨터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었고, 스티브 돔피어의 알테어가 보여준 간단하고 자그만 연주는 첫걸음을 내디딘 듯이 보였다. “컴퓨터 역사에서 중대한 성과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밥 마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돔피어는 『PCC』 다음 호에 ‘음악, 나름대로’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 기계어 코드와 자신의 경험을 실었고, 이후로 여러 달 동안 알테어 소유자로부터 전화가 쇄도했다. 때로는 한 번에 세 사람에게 한밤중에 전화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해 보이기도 했다. 돔피어는 이와 같은 전화를 400통 넘게 받았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해커가 있었다.

 

 

리 펠젠스타인이 차고에서 만난 실업자 밥 마쉬는 그 작은 차고에서 벌어진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는 흥분에 흠뻑 취해 홈브루 첫 모임을 떠났다. 그때까지 마쉬는 감히 개인용 컴퓨터라는 개념을 꿈꾸는 사람이 극소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긴 머리 스티브 돔피어는 MITS라는 별 볼 일 없는 회사에 수천 건에 이르는 주문이 들어오더라고 전했다. 바로 그 자리 그 순간, 밥 마쉬는 향후 몇 년 안에 해커 친목 단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마찬가지로 해커 친목 단체에도 연료가 필요했다. 알테어의 반짝이는 LED는 흥미진진했지만, 진짜 해커들이 온갖 주변 장치를 (MITS가 확실히 제공하지 못하는 주변 장치를) 요구하리라는 사실을 마쉬는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터였다. 알테어는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멋진 시스템의 기반이었다. PDP-1이나 PDP-6가 만족스러운 운영체제 없이 마술 상자 채로 MIT에 도착했을 때 MIT 해커들이 어셈블러와 디버거와 온갖 하드웨어 도구와 소프트웨어 도구를 만들어 새로운 시스템 제작과 심지어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용이하게 만들었듯이, 알테어 8800에 자신들의 족적을 남기는 일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은 이들 하드웨어 해커의 몫이었다.

 

 

밥 마쉬는 이런 작업이 바로 새로운 시대, 굉장한 기회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고돈 프렌치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마쉬는 알테어 버스의 빈 슬롯에 연결할 몇몇 회로 보드를 설계하고 제작하려는 결심을 굳혔다. 이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밥 마쉬 혼자는 아니었다. 사실 모임이 열렸던 멘로 공원 바로 옆 동네인 팔로 알토에서 해리 갈랜드와 로저 멜렌이라는 스탠퍼드 대학 교수 두 명이 이미 알테어용 추가 기능 보드를 제작하는 중이었다. 첫 모임에 대해 몰랐던 그들은 하드웨어 광들의 두 번째 모임에 참석했었으며 이후로 꼬박꼬박 모습을 드러냈다.

 

 

교수 두 명은 1974년 후반 장신의 거구 멜렌이 『파풀러 일렉트로닉스』 지 뉴욕 사무실로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알테어의 소문을 처음 접했다. 멜렌은 평소 자주 더듬거리는 바람에 아주 살짝 재기 발랄함을 망치곤 했다. 멜렌과 갈랜드는 취미가들이 여가에 즐길 만한 프로젝트 소개 기사를 써왔고, 막 TV 카메라 제어 장치 제작법에 대한 기사를 끝낸 참이었다.

 

 

멜렌은 솔로몬의 책상 위에서 이상한 상자를 발견하고 무엇인지 물었다. 솔로몬은 그것이 에드 로버츠가 보낸 알테어 프로토타입이라 말했다. 앞서 항공 소포로 보냈다가 잃어버린 프로토타입을 대체하는 모델로, 가격이 400불도 안 되는 8080 마이크로컴퓨터라 설명했다. 로저 멜렌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솔로몬은 의심스럽다면 직접 알바커키에 있는 에드 로버츠에게 연락해보라고 말했다. 멜렌은 주저없이 에드 로버츠에게 전화했고, 서부로 돌아가는 길에 알바커키에 잠시 들르기로 결정했다. 멜렌은 컴퓨터 두 대를 구매할 작정이었다. 게다가 에드 로버츠는 멜렌과 갈랜드가 『파풀러 일렉트로닉스』 지에 기고한 프로젝트를 허가받아 사용했으나 한 번도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그래서 멜렌이 에드 로버츠와 의논할 사안은 두 가지였다.

 

 

하지만 멜렌 생각에는 적절한 때에 나온 적절한 장난감인 알테어 컴퓨터가 단연코 더 중요했고, 그날 밤 멜렌은 알테어를 소유한다는 기대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수수한 MITS 본사에 도착한 멜렌은 집으로 가져갈 알테어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하지만 맹렬한 비전으로 무장한 골수 엔지니어 에드 로버츠는 흥미로운 친구였다. 두 사람은 새벽 5시까지 비전의 기술적인 측면을 논했다. 그때는 『파풀러 엘렉트로닉스』 지에 알테어 기사가 실리기 전이었고, 로버츠는 사람들 반응이 어떨지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알테어에 장착할 추가 기능 보드를 다른 누군가에게 위탁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로버츠는 멜렌과 갈랜드에게 초창기 프로토타입을 보내기로 동의했다. 그러면 멜렌과 갈랜드는 알테어에 TV 카메라를 연결할 뭔가를 만들고, 이어서 비디오 이미지를 출력할 보드도 만들 계획이었다.

 

 

이렇게 갈랜드와 멜렌은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회사 이름은 그들이 한때 살았던 스탠퍼드 기숙사 크로더스 메모리얼을 기념해 크로멤코라 지었다. 두 사람은 홈브루 모임에서 비슷한 영혼들을 발견하여 굉장히 기뻤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의 친구 개리 잉그람을 설득해 프로세서 테크놀로지라는 회사를 함께 설립한 밥 마쉬였다. 마쉬는 알테어 소유자들의 가장 다급한 요구가 기본으로 내장된 찌질한 256바이트보다 큰 메모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마쉬는 메모리 2K를 제공하는 보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계획했다(1K는 1,024바이트다). MITS도 자사 메모리 보드를 공표했고 일부 고객에게 이미 배송했다. 멋진 메모리 보드였으나 동작하지 않았다. 마쉬는 PCC에 있는 알테어를 빌려다 신중하게 살펴보고 설명서를 빠짐없이 탐독했다. 처음에는 설명서를 복사할 금전적 여유가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쉬는 ‘로버츠가 MITS를 운영하는 방식’ 그대로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제품을 발표한다. 그런 다음 제품 설계와 제조에 필요한 돈을 모은다.

 

 

그래서 4월 1일 만우절, 마쉬와 잉그람은 공식적으로 회사를 출범했다(은둔형 엔지니어 잉그람은 홈브루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임은 잉그람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훗날 마쉬는 말했다). 마쉬는 고생해서 돈을 긁어모아 계획 중인 제품군을 설명하는 안내지 50부를 복사했다. 4월 2일 마쉬는 세 번째 홈브루 모임에 참여해 안내지를 나눠주며 미리 주문하는 사람에게 20%를 할인해주겠다고 공표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훗날 마쉬는 이렇게 표현했다. “절망을 느꼈습니다. 망했다, 실패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첫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겨우 45불짜리 ROM (메모리) 보드였습니다. 크로멤코라는 회사에서 ‘30일 신용거래’를 요청하는 주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크로멤코가 누구야? 왜 현금을 내지 않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더 절망을 느꼈습니다. 완전히 망할 거야! 다음 날 주문 3개가 들어왔고, 이어서 일주일 안에 현금 2,500불이 들어왔습니다. 1,000불을 빼내 『파풀러 일렉트로닉스』 지에 그럴듯한 6쪽짜리 광고를 실었고, 그 후로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두 달 만에 10만 불어치 주문이 들어왔으니까요”.

 

 

흥미롭게도 마쉬나 다른 해커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대규모 사업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자기기를 갖고 놀거나, 조그만 컴퓨터라는 신계계를 탐험하는 여가 활동에 돈을 댈 방법이 필요할 뿐이었다. 보드 만들기라는 열정을 품은 채 첫 홈브루 모임을 마친 마쉬와 다른 해커들에게 재미는 이제 시작이었다. 뭔가를 설계하고 만든다. 에드 로버츠의 복잡 미묘한 버스에 장착할 디지털 로직 ICIntegrated Circuit보드의 얽힘과 설킴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마쉬는 알테어용 보드 제작이 대작 소설을 쓰는 작업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혹한 홈브루 논평가들은 주의 깊게 살필 기세였다. 그들은 돌아간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키텍처의 상대적인 미와 안정성까지 평가할 터였다. 보드의 회로 배치는 설계자의 성격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심지어 설계자가 보드를 장착할 때 사용한 구멍의 품질처럼 극히 피상적인 요소조차 설계자가 동기, 철학, 기품에 전념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디지털 설계는 “당신이 가진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라고 리 펠젠스타인이 언젠가 말했다. “하드웨어 설계를 보면 사람이 보입니다. 보드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오죠. 맙소사, 이 친구는 지렁이처럼 설계하는군.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게다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잖아”.

 

 

밥 마쉬는 프로세스 테크놀로지가 품질이 뛰어난 제품으로 알려지기 바랐다. 그래서 단순히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 이후 몇 달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보냈다. 회사만이 아니라 마쉬의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보드 기능을 결정한 후에는 기판 배치를 설계하느라 많은 밤을 지새웠다. 8080 칩 동작을 설명하는 매뉴얼을 들여다보며 이곳저곳 필요한 섹션 번호를 받아적고 (이 섹션은 입력으로, 저 섹션은 메모리로 지정한 후) 머릿속에서 검은 플라스틱 조각 내부의 미로 격자를 배치하기 시작한다. 접근을 위해 선택한 섹션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는 그 그림을 머릿속에 얼마나 잘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담아두는지에 좌우되었다.

 

 

보드 한쪽 면을 향하는 연결은 파란색으로, 다른 면에 향하는 연결은 빨간색으로 표시하며 연필로 그렸다. 그런 다음은 마일라(폴리에스테르 필름)를 가져와 형광 테이블 위 격자 위에 올려놓고 주름 종이테이프를 사용해 개략적으로 연결 내용을 배치했다. 한 곳에 너무 몰린다든가, 배선이 너무 빡빡하다든가 하는 문제를 발견하면 배치를 바꿔야만 했다. 한 가지 실수만으로도 전체를 망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회로도의 중첩은 필수였다. 종이테이프로 배치한 설계 위에 오버레이(종이나 삽화에 얼룩이 묻지 않게 덮어 두는 판)를 올린 후 혹시라도 선 세 가닥을 한꺼번에 연결하는 등의 중대한 과실이 없는지 살폈다. 만약 회로도 자체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위층과 아래층에 들어가는 연결 상태가 독립적인 집합으로 유지하도록 보드를 여러 층으로 설계하는 방법도 적용했다. 때로 종이테이프가 벗겨지거나, 조그만 테이프 조각이 남아돌거나, 머리카락이 어딘가로 들어갔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실수는 청사진 출력소에서 만들어주는 (혹은 돈이 없어 복사기로 주의 깊게 복사한) 적갈색 복사지에 정확히 복제되어 파멸을 초래하는 합선으로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보드 제작 회사에 구멍 뚫을 위치와 도금할 부분 등을 알려주는 정보를 회로도에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근처 보드 제작 회사를 찾아가 회로도를 건네주었다. 경기가 여전히 좋지 않은 터라 비록 꾀죄죄하고 삼류에 눈빛이 흐리멍텅한 하드웨어 해커가 내미는 주문이라도 그들은 기쁘게 받아주었다. 그들은 회로도를 디지타이저 위에 놓고 구멍을 뚫은 후 녹색 에폭시 자재 위에 수많은 은색 연결선을 만들었다. 이것은 사치스러운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주방 스토브 위에서 직접 기판을 에칭했다. 인쇄 회로 기판에다 재료를 녹여 희미하게 선을 그렸는데, 자칫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정교한 작업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쉬는 강박적으로 세심한 사람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말로 빠져들었습니다. 제가 설계하는 회로와 하나가 되었죠”.

 

 

첫 메모리 보드는 마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주었다. 격주로 열리는 홈브루 모임에서 그리고 매일매일 전화로, 잠수부가 산소를 갈망하듯 극도로 흥분한 사람들이, 메모리 확장 보드를 갈망했다. 훗날 마쉬는 그들의 외침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보드는 어디 있죠? 필요합니다. 꼭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마쉬는 설계를 끝냈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을 제작할 시간이 없었다. 마쉬는 알테어 버스 슬롯에 딱 맞는 크기로 보드를 제작했다. 에칭된 금색 연결 단자가 약간 돌출된 녹색 에폭시 사각형 보드였다. 칩과 전선은 키트 조립자가 직접 납땜해야 했다(프로세스 테크놀로지는 처음에 조립되지 않은 보드만 팔았다). 마시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테스트할 알테어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마쉬는 홈브루에서 만난 돔피어라는 사람에게 전화하여 알테어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돔피어에게 알테어는 (결혼했더라면) 자식만큼 소중했으므로 작은 빨간색 담요에 알테어를 조심스럽게 감싸 마쉬에게 가져왔다. 돔피어는 정석대로 기계를 조립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납땜할 때는 정전기를 줄이고자 손목에 구리 팔찌를 찼으며, 컴퓨터의 연약한 8080 심장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러니 마쉬의 작업장에 알테어를 살포시 내려놓은 직후 하드웨어 베테랑 마쉬와 잉그람이 차량 정비공이 머플러를 설치하듯 칩을 다루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저분한 손으로 칩을 잡아 비틀어 빼냈다가 다시 끼워 넣었다. 돔피어는 공포에 질린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준비를 끝냈고, 잉그람이 스위치를 켜자 스티브 돔피어의 소중한 컴퓨터는 쉬익거리며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보드를 거꾸로 장착한 탓이었다.

 

 

돔피어의 알테어를 고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스티브 돔피어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돔피어는 테스트를 더해보라고 자기 기계를 프로세서 테크놀로지에 빌려주었다. 홈브루 정신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이들은 범접하기 어려운 MIT 마법사들과 다른 종족이었지만 소유와 이기심을 공공의 이익으로 승화시키는 해커 윤리는 똑같이 따랐다. 여기서 공공의 이익은 사람들의 해킹을 좀 더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스티브 돔피어는 자신의 알테어가 걱정스러웠지만, 그 역시 알테어에 진짜 프로그램을 돌리려면 메모리 보드가 절실히 필요했다. 일단 보드를 쥐고 나면, 알테어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유틸리티를 구현하기 위해 I/O 장치, 화면 장치는 물론이고 더 많은 장치가 필요했다.

 

 

도구를 만드는 도구, 자신의 알테어 속에 있는 신비한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 세상으로 깊이 들어갈 도구가 필요했다. 밥 마쉬를 비롯한 홈브루 해커들에게 있어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람이든, 단순히 호기심 넘치는 해커든, 모두가 한배를 탄 몸이었다. 세크레멘토에서 산호세까지 흩어진 이들은, MIT에서 PDP-6를 중심으로 생겨났던 공동체처럼 지리적으로 묶이지는 않았으나 강한 연대를 형성한 공동체였다. 6월 초, 밥 마쉬가 첫 출시작 보드를 들고 홈브루 모임에 나타났을 때 보드를 주문했던 사람들은 너무도 감사하는 태도였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마쉬가 보드를 공짜로 나눠준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마쉬는 작은 플라스틱 뽁뽁이로 포장한 보드와 IC 그리고 리 펠젠스타인이 작성한 안내서를 건네주었다. “숙련된 키트 조립자가 아니라면 조립하지 마시오”라고 리는 경고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물건을 조립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그나마 조립할 줄 아는 사람 대다수는 그날 그 방에 있었다. SLACStanford Linear Accelerator 강당에서 열린 모임은 가벼운 첫 만남 이후 넉 달이 지난 시점이었고 회원 수는 거의 10배로 늘어났다.

 

 

 

 

해커, 광기의 랩소디 : 세상을 바꾼 컴퓨터 혁명의 영웅들(복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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